판타지 RPG에 D&D가 있다면 SF RPG엔 트레블러(Traveller)가 있으리라! 라는 포부를 갖고 1970년에 시작해서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트레블러 세계관의 3천년 전을 다룬 룰북입니다. 참, GURPS Traveller : Interstellar Wars를 일일이 다 치는 건 힘들고 귀찮으니까 -_- 앞으로는 GURPS TIW로 줄여서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트레블러의 용어로 설명하자면, 지구인들이 철을 제련하는 방법을 막 발견했을 무렵 거의 대부분의 기술 혁신을 끝내고 기원후 500년 무렵에 지루 시르카(Ziru Sirka : The Grand Empire Of Stars, The Vilani Imperium)란 이름의 수천의 성계를 거느린 제국을 세우고 이제는 썩어가기 시작하는 고인 물이 되고 있었던 제1 제국과, 21세기 후반 자기들의 손으로 항성간 여행에 쓸 수 있을만한 점프 드라이브를 발명해서 맨 처음 시험 가동을 해 보니 어느 새 그 성계를 차지하고 있었던 우주 제국을 만나 사투를 벌이는 제2 제국의 이야기 정도가 되겠군요. 트레블러 본편에 따르면 이 시기가 제3 제국의 성립에 있어 아주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시기라고 하는데, 전 트레블러 본편을 읽어 본 적이 없어서 거기까진 잘 모르겠습니다. 이 쪽에 대해서는 본편을 아시는 분이 설명해 주시기 바라며 (...)



룰북에서의 세계관 설명은 21세기 초반의 지구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이 때 테라(Terra : 많은 SF에서 지구를 이렇게 부릅니다. GURPS TIW도 이 전통을 따르고 있습니다)는 전쟁과 혁명, 테러, 기아, 전세계적 전염병, 급격한 기후 변화, 경제적 재앙으로 인해 세계 최강의 강대국도 다른 나라의 협조 없이는 해결할 수 없는 아주 큰 위기에 닥쳐 있었고, 개별 주권 국가들의 삽질과 병크-_-(테러리스트를 보호해 준다던지, 환경 문제와 경제 공황 등 지구적 위기를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는지, 자국민의 인권을 유린한다던지...)로 인해 개별 국가의 주권을 보호해 줘야 한다는 개념 자체가 의심을 받고 있었습니다.
시대가 지나면서 개별 국가의 "내정"이 세계 정세에 미치는 영향이 갈수록 커져가면서, 개별 국가의 정책에 대한 견제와 조율이 필요해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 테라를 강타했던 명백한 전세계적 위기에 대해 테라 전체를 효율적으로 통솔할 기구가 필요해지기도 했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 2024년 뉴욕 조약(Treaty of New York)이 맺어지게 됩니다. UN 총회와 안보리의 권한은 대폭 박탈되어 사무국과 사무총장에 각각 이관되고(정확히 말하면 UN 총회는 껍데기뿐인 단체로 남게 되고 안보리는 아예 폐지됩니다), UN 사무국은, 형식적으로 테라의 모든 국가에서 위원이 선발되지만 대부분의 의석과 실권은 몇 개 강대국에 집중된 자문위원회(Advisory Board)의 관할 하에 놓이게 됩니다. 그리고 사무총장은 이 자문위원회에서 임명하게 됩니다(그에 따라 강대국은 사무총장을 배출할 수 없다는 일종의 불문율이 깨지게 됩니다. 사실상 강대국을 견제할 수단을 없앤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가 아니라 없앤 겁니다). UN 사무국과 사무총장은 UN의 모든 가입국에 대해서 결속력을 갖는 정책을 집행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강대국들은 자국 군대의 상당량을 UN 직속 군대로 기증하며, 인도주의적 활동이나 범국가적 개발을 지원하는 위원회들은 강대국의 밀접한 감독을 받게 됩니다(그리고 훨씬 더 많은 예산을 지원받게 됩니다).

당연하게도 이런 조약을 반기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이 조약을 앞장서서 체결한 강대국 자신들도 자기들이 기존에 갖고 있었던 수많은 이권을 다른 조직에 넘겨야 한다는 현실을 꽤나 불쾌하게 느꼈습니다. 한편 약소국들은 이 조약을 세계 정부의 탄생으로 받아들이고, 몇백년 전 자신들을 핍박했던 제국주의가 부활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뉴욕 조약 이후 UN은 위기 사항이 일어났다 하면 사사껀껀 간섭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무장 분쟁 등의 일이 생기면 바로 UN 직속의 평화유지군을 보내서 일단 무력으로 응징한 다음에 피해자들에게 인도적 구호를 베풀었으니까요.
2040년대 후반까지 세계 각처에 수많은 평화유지군이 파견되었습니다. 물론 UN 자기 나름대로는 다른 명분이 있었겠지만, 제일 주된 이유는 세계정부로 군림하게 된 UN을 반대하는 무력 소요가 그렇게 많았던 것이겠지요. 하지만 누구도 뉴욕 조약보다 더 나은 방법을 찾아내지는 못했습니다. 뉴욕 조약과 새 UN은 그 자신이 해결한 문제만큼이나 많은 새로운 문제를 만들어냈습니다만, 어쨌든간 2040년 후반에 접어들자 지구적 위기는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한편 이런 지구적 위기가 최고조를 달릴 때도 테라의 국가들은 우주의 잠재성을 인식했고, 우주 개척에 따르는 여러 가지 국제적 잡무를 해결하기 위해 2015년엔 UN 우주 협동 위원회(UNSCA : UN Space Coordination Agency)가 설립되었습니다. 이 쯤에서 우주 개발의 상황을 보자면, 2013년 루나(Luna : 굳이 설명이 필요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에 아르키메데스 스테이션, 2022년엔 코페르니쿠스 거주지라는 식민지가 각각 세워지긴 했지만 2040년대 후반까지는 거의 이름만 남아 있는 형태였습니다. 그러다가 2040년대에 테라의 위기가 사그라들고 강대국들이 우주 개발에 투자를 할 여유가 생기기 시작하면서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우주 개발이 시작됩니다. 명목상으로만 존재하던 달 거주지는 완전한 마을로 거듭나고, 지구 궤도와 L5 라그랑주 지점에도 정류장이 들어서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2052년 UNSCA의 루나 기지에서 중력 제어 장치가, 2064년 케레스 기지에서 무반응 추진기가 각각 개발되면서 인간이 우주로 진출하는 데 필요한 비용은 1/100 수준까지 떨어집니다. 하긴 인류의 우주 진출에서 가장 큰 걸림돌 두 가지가 탈출 속도까지 로켓을 가속시킬 연료의 문제와 탈출 속도에서 조종사들에게 미칠 중력가속도를 버티는 문제였는데, 이 두 가지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된 것이니 말입니다.
룰북에는 안 나온 얘기지만-_- 과학적으로 상식이 있으신 분들은 이 발명품이 우주개척 말고도 쓸데가 무궁무진하다는 걸 아실 겁니다. 실제로 중력 제어 장치 덕택에 테라의 건축 기술은 비약적으로 향상되고, 중력 제어 장치와 무반응 추진기 덕분에 물류비용 자체가 놀랄만큼 줄어드니까요. 그리고 룰북에 따르면 2170년까지 테라의 환경 문제는 상당수 회복되었다고 나오는데, 제 생각엔 그 변화의 최첨단을 달리는 발명품 중에 이 무반응 추진기가 있지 않나 생각입니다. 당연한 얘긴데, 무반응 추진기에서 오염물질이 나올 리가 없지 않습니까?

어쨌든 이에 따라 진정한 의미의 우주 개발이 시작되고, 2050년대 초반엔 유럽 연합에선 세대 우주선들을 만들어서 한 대는 이미 정원 행성(Garden World : 인간이 살기에 적당한 온도와 충분한 액체 물을 갖추고, 그 지역 고유의 혹은 외부에 의해 구축된 생태계가 존재하는 행성을 일컫는 분류입니다)이 존재한다고 밝혀진 알파 켄타우리 성계(나중에 프로메테우스라는 이름의 식민지가 개척됩니다)로, 나머지들은 인간이 정착할 수 있는 세계를 찾기 위해 은하 곳곳으로 쏘아 보내기 시작합니다. 이들 중엔 심지어 우주에서 몇백년을 보내도록 계획된 것도 있습니다.

그리고 UNSCA의 케레스 기지는 2088년엔 태양계 내부 정도 거리를, 2092년엔 1파섹 거리를 도약할 수 있는 점프 드라이브를 개발해 냅니다. 하지만 이 자체로는 기껏해야 태양계 안에서 뛰어다니는 것 말고는 당장엔 아무런 쓸모가 있어 보이지 않았습니다. 초공간 도약을 계산하기 위한 수식(數式)에 따르면 점프 드라이브는 거대한 질량체 주변으로만 함선을 도약시킬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아시다시피 태양계에서 제일 가까운 항성인 알파 켄타우리마저 태양에서의 거리가 벌써 1파섹을 넘어가지요. 따라서 유럽 연합은 그 당장에선 점프 드라이브의 쓸모를 느끼지 못하고, 이전처럼 우주 개발을 세대 우주선에 계속 의지하게 됩니다.

하지만 미국은 버나드 별(Barnard's Star)까지 점프 드라이브를 탑재한 유인 탐사선을 보낼 계획을 세우고 - 냉전 시대 미국의 우주 개발이 그랬다시피 명목상으로는 다국적 계획인 이 계획도 사실상 세계를 대상으로 미국의 자존심을 세우려는 선전용 탐사의 성격이 강했습니다 - 태양에서 버나드 별 사이에서 현재 기술력의 점프 드라이브로 도달할 수 있는 거대 질량체 즉 '점프 포인트'를 찾기 시작합니다. 무척이나 어려운 작업이었습니다만 다행히 미국의 과학자들은 태양과 버나드 별 사이에 있던 떠돌이 행성을 하나 발견합니다. 점프 드라이브를 탑재한 함선이 루나에서 그 행성까지, 연료 보급창을 급조하느라 몇 번을 왔다갔다했습니다.
(아, 여기서 말하는 '연료'는 점프 드라이브를 가동시키는 데 필요한 연료를 의미합니다. 일부는 점프 드라이브를 가동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를 만드는 데, 일부는 점프 드라이브의 냉각재로 쓰이고, 일부는 초공간 우주에서 우주선이 들어가 있는 일반 우주 방울-_-을 유지하기 위해서 우주선 밖으로 뿌려집니다. 기술적으로 잘못된 말임에도 불구하고 관행적으로 '연료'라고 부릅니다.... 라고 룰북에 써 있네요.)

마침내 2097년, 당시까지의 인류 역사상 점프 드라이브를 장착한 함선 중 가장 큰 함선이었던 Starleaper One이 완성되어, 1년동안 그 성계를 탐사할 계획을 갖고 발진하게 됩니다.

하지만 2098년에 Starleaper One이 버나드 별에서의 탐사 결과를 공표했을 때, 테라 사회는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탐사원들의 발견에 따르면 버나드 별엔 외계 지성체가 살고 있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외계인들은 생물학적으로 인간과 완벽히 동일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의 문화는 테라에 존재하는 그 어떤 문명의 문화와도 연관성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수천 개의 성계를 거느린 유구하고 광대한 제국의 주민인 빌라니(Vilani)이며, 자신들의 제국의 국경은 태양계에서 몇 파섹밖에는 떨어져 있지 않다고 주장했습니다.

물론 테라 인들이 아는 한엔 지금까지 인류가 다른 항성계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고, 호모 사피엔스란 생물종은 지구에서 독자적으로 진화한 종이었습니다. 20세기 무렵 항간에 떠돌아다니던 그 황당한 고대문명에 대한 이야기가 사실이라고 믿지 않는 이상은 대체 언제 인간이 항성계 몇천개를 거느린 제국을 세우고 다녔는지 도저히 설명을 할 수가 없었던 겁니다.



기원전 4000년, 테라엔 그 어떤 문명도 없었습니다. 정착 농경 생활은 몇몇 축복받은 지역에서나 시작되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 행성의 가장 큰 마을도 인구가 1000명을 넘기지 못했습니다. 수메르의 신화적인 도시국가나, 피라미드를 건설하던 이집트 왕조나, 중국 상은(商殷) 왕조의 반쯤 신화적인 왕들은 모두 몇 세기는 더 지나야 나타납니다.
기원전 4000년, 빌라니라고 알려진 인간 종족은 벌써 점프 드라이브를 발명해서 은하계를 바쁘게 탐사하고 있었습니다. 이집트가 피라미드를 만들 때, 빌라니는 항성간 식민지를 만들었습니다. 그리스가 팔랑크스 전술을 개발했을 때, 빌라니는 은하를 정벌할 계획을 실행하고 있었습니다. 로마가 흥하고 쇠락할 때, 빌라니는 만 개의 행성에 걸친 성간 제국을 건설했습니다. 지루 시르카, "별들의 대제국"이라고도 불리는 그 제국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빌라니는 우주 곳곳을 누비면서 수많은 외계 지성체를 발견했고 그들과 오랫동안 무역 관계를 성립시켰습니다. 하지만 많은 문명들이 빌라니가 갖다 준 기술들을 빌라니의 마음에 들지 않는 방향으로 쓰기 시작했고 - 무분별하게 기술을 혁신하고, 샹가림(Shangarim : 빌라니가 우주로 진출함에 따라 정부의 역할을 포섭-_-해 버린 거대 기업국가입니다. 다음 게시물에서 자세히 설명합니다)에게 로얄티를 체납하고, 빌라니에게 정면으로 대치하는 성간 제국을 세운다던지 - 시간이 지남에 따라 빌라니는 이런 현실에 불만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 빌라니는 평화로운 상인으로서 우주에 진출했지만, 이제 그들은 전투 함대를 출정시키고 그들에게 알려진 우주 전체를 그들의 직접 통제 하에 두었습니다.

기원후 500년, 베가 정체(Vegan Polity)란 이름의, 알려진 마지막 외계 우주 문명을 정복하고 동화함으로써 통합 전쟁(Consolidation Wars)이라고 불릴 그 전쟁은 마침내 막을 내렸습니다. 익시르디(Igsiirdi)라고 불리는, 샹가림의 지배를 받는 통치 위원회는 공식적으로 성간 제국의 성립을 선포했습니다. 지루 시르카, 즉 "별들의 대제국"은 세 샹가림이 모든 지성체의 이익을 위해 통치하는 제국이 될 것이었습니다.

신생 제국의 첫번째 목표는 바로 안정성이었습니다. 국경 너머를 향한 정찰과 개척은 점점 줄어들고 특수한 상황에서만 행해지다가 몇 세기가 지나자 아예 멈췄습니다. 기술 혁신은 훨씬 더 엄격하게 관리되었습니다. 탐욕과 개인적 욕망은 제국의 체제 안에서 더 높은 지위를 추구하는 등의 더 '안전한' 방향으로 전환되었습니다.

하지만 신생 제국의 모두가 이 '성취'를 맘에 들어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제국 역사의 초창기에도 가끔씩 반체제 분파들이 나타났습니다. 이들 중 키마샤르구르(Kimashargur : Virtue of the Foremost) 운동은 기원후 800년 무렵 제국의 은하 테두리 쪽 지방에서 아주 강력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들은 제국이 우주 탐사와 기술 발전에 대한 규제를 늦춰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적어도 제국 사회의 일부분만이라도 그런 목표를 계속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제국의 안정성에 대해서도, 외부에서 세력이 발호해서 제국의 권위에 도전하면 그 안정성은 무너질 수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누군가'는 이러한 위협에 대해서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럼으로써 제국 사회 전체에 혹시 있을 지 모를 위협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습니다.

제국은 당분간 키마샤르구르 운동을 용인했습니다만, 기원후 950년 궁극적으로 이들을 무너뜨렸습니다. 수천의 키마샤르구르는 제국 영토 밖으로 피신해서 은하 테두리 쪽 국경 너머에 정착했습니다. 이들이 정착한 항성계는 모두 테라에서 몇 파섹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이 시기에 이들이 테라를 정찰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하지만 혹시 그랬다고 하더라도, 그 기록은 소실된 것으로 보입니다.

기원후 1000년 무렵 키마샤르구르 추방자들은 딩기르(Dingir) 항성계를 수도로 하는 작은 제국을 세웠습니다. 한 세기 동안 이 반체제 분파는 번영했고 그들의 새로운 행성들을 개척하며 제국이 그들에게 부과했던 빌라니의 문화적 규범에서 벗어났습니다. 운나쁘게도 기원후 1100년, 제국은 함대를 모아 키마샤르구르 국가를 강제로 합병했습니다. 전쟁은 짧지만 가혹했고, 수 세기가 지나도록 이들은 당시 제국의 만행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키마샤르구르를 정벌한 이래 은하 테두리 쪽 제국의 국경은 1000년 동안 변하지 않았습니다. 빌라니는 더 이상 영토 확장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 2098년, 제국의 허가 없이 버나드 별을 탐사하던 키마샤르구르 탐사대는 1000년 전 자신들의 예상이 맞아떨어졌음을 직접 확인하게 됩니다.